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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의 징후 (망명)

첫째, 어느 날 야학당에 모인 학생들에게 무엇이 소원이냐고 물었을 때, 여러 가지 희망사항이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백창기(白昌基)라는 학생이 “나는 왜놈 하나를 내 철권으로 즉시 때려잡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말했다.
 

둘째, 윤의사의 부인은 윤 의사가 출가 망명할 때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의사가 출발하는 날 아침 부엌에 들어와 밥하는 자신에게 보고 물 한 그릇 달라 하고, 곧 방으로 들어가더니, 모순이 얼굴을 바라보며 자는 아기를 어르고 또 다시 부엌으로 와 부인 얼굴을 바라보니, 부인이 생각하기를 이이가 유달리 변덕을 피더라고 말했다 한다.
 

세째, 출가 전 날 의사의 자당이 갈매(지금의 갈산) 매부 간선을 보러 갈 때 주막 옆에 있는 송방에 들어가 막과자를 사서 어머니께 드리고 잘 다녀 오라고 태연히 작별 인사를 하더라고 어머니가 술회했다.
 

네째, 백창기는 윤의사가 비장한 가출임에도 불구하고 의사가 흰 두루마기에 구두를 신고 도리우찌를 쓰고 사지에 가는 게 아니라 위풍당당 개선 장군인양 훨훨 날아가듯 걸어가더라고 말했다.
 

새로운 결심 (망명)

윤의사는 무식을 깨우치고, 보다 살기 좋게 하고, 세상 보는 눈을 다르게 하는 것이 일제 식민지로부터 우리가 해방되어 독립되는 줄 믿으며 활동 하였으나, ‘내가 그간 하고 있던 독립 운동은 독립으로 가는 큰 길에 일제라는 큰 바위가 가로막은 것을 조그마한 끌과 망치로 쪼아내는 형국이다. 
어느 세월에 이것을 쪼아 없앨 것인가?’ 하며 한탄과 좌절 하던 중 마지막 학예회로 이 작은 운동마저 할 수 없는 형세로 되어가고 있었다. 
이에 ‘내 철권이 썩기 전에 무엇인가 해야 하겠다’는 각오가 생겨 일제라는 큰 바위를 단번에 폭파하여 제거할 결심을 한다.

 

망명 (망명)

윤 의사의 자필이력서 한 구절에 “여기에 각오는 별것이 아니다. 나의 철권으로 적을 즉각 쳐부수려 한 것이다. 
이 철권은 눈 속에 들어가면 무소용(無所用)다. 늙어지면 무용이나 내 귀에 암암쟁쟁한 것은 상해임시정부였다. 
다언불요(多言不要), 이 각오로 상해를 목적하고 사랑스러운 부모 형제와 엄처애자와 정든 고향산천을 버리고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압록강을 건넜다.” 




윤 의사는 오치서숙과 결혼 중에 얻은 동학사상, 농민독본편저에서 얻은 김성환의 여러 생각, 그리고 한말의 홍주 유교부식회의 상해임시정부 산하 광복군 모집 파견,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등을 통하여 자기 진로에 대한 새로운 이정표를 장고 끝에 설계했다

망명경로 (망명)

신득을 만나지 못하고 만주로 출발하다
1930년 3월 6일, 고향을 떠나 만주로 향했다. 매헌은 경남선에 몸을 싣고 가던 중 서울역에서 내렸다. 그는 끝까지 자기를 배신하지 않고 도와준 사촌이자 동기인 신득을 만나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찾았으나 그가 집에 없어 만나지 못했다. 

선천경찰서에 피검되다.
 할 수 없이 그는 서울역으로 가 만주로 향하던 중 3월 7일 선천에서 불심검문에 걸려 선천경찰서에서 근 한 달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 후 만주로 다시 탈출하여 대련을 거쳐 중국 청도로 건너갔다.
 



청도에서
그의 자필이력서 중에 ‘나서보니 먼저 닥치는 것은 금전의 고통이다. 간신히 청도까지 왔으나 상해까지 갈 여비는 없었다. 그러므로 일인 (나까하라 겐지)이 경영하는 中原兼次郞 세탁소의 직공이 되었다. 출가할 때 여비는 월진회 회원들이 근근이 저축한 돈이었다. 따라서 내가 세탁소에 고용이 된 이상에는 그 돈을 월진회에 상환하고 여비가 되는 대로 상해로 갈 여비를 마련하려 하였다. 그래서 그 곳에서 1년 간 체류하였다.’ 

한일진을 미국으로 보냄.
윤 의사는 상해로 갈 여비가 어느 정도 모였을 때, 한일진이라는 청년이 미국으로 망명하려는데 여비가 부족하다 하여 그간 모은 돈을 전부 그에게 주었다. (이 사실은 자필이력서에는 나타나있지 않으나 의사의 상해 의거 소식을 듣고 한일진이 미화 300불을 고향 부친 윤 황씨에게 송금하여 알게 된 일이다. 가족은 이 돈의 용도를 상의한 끝에 아래채를 짓기로 합의했고, 그 아래채가 바로 충의사 내 ‘저한당’이다. )

노동 운동
매헌이 24세 때 5월 8일에 목적지인 상해에 닿았다. 그는 자필이력서에 기술했던 글이다. 
‘나를 맞는 사람은 없었으나, 목적지에 온 것만은 무상 기뻤다. 남의 주머니에 금이 들었는지, 똥이 들었는지 누가 알리오. 와서 보니 또 닥치는 것은 금전의 곤란이다. 
그래서 말총공사 직공이 되었다, 그 공장에는 한인 공우가 17명이었으므로 한인 공우 친목회가 창립되었다. 
나는 공우회의 회장이라는 명칭으로 되었다. 
그런데 공장주 박진이와 사소한 감정이 생겨 해고를 당하고 계춘건(桂春建)군과 같이 홍구 소채(蔬菜)장을 개점하였다. 그리고 그 후는 여러 선생님들이 아실 것이다